곡성성당내 감옥터





  • 구분 : 성지
  • 소재지 : 전남 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425
  • 전화: 061)362-1004


춘향이 그네 뛰던 남원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2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 파란의 역사를 간직하고 수려한 자태를 보이는 지리산 국립 공원 산자락 아래 자리한 곡성은 1827년 정해박해의 발상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 터가 있는 곳이다.

곡성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27년 전라 남도 곡성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조그만 사건이 그만 교난으로 확대되니 이것이 정해박해이다. 곡성은 정해박해의 발상지로 그 시초는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들과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순교자 한덕원(토마)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이 벌어지고 거나하게 취한 그는 주막집 주인에게 행패를 부린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주인 김씨 내외는 그를 포함해 몇 명을 관가에 고발했고 곡성 현감은 관내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경 실색, 닥치는 대로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곡성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피신하는 신자들을 따라 탄압의 손길이 퍼져 나가 급기야는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는데 전주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했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누구러졌지만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 생활을 전폐하고 심산 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해박해 당시 전라 감사 이광문(李光文)이 추위 더위와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많은 수를 배교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때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그들 대부분이 배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내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박해 시초에 곡성에서 체포된 이 바오로의 누이이며 이명의의 어머니인 이 막달레나는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백천으로 귀양 가 4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1830년 5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고산(高山)에서 포졸에게 온 가족 13명과 함께 잡힌 이성지(세자 요한)는 무려 9년 동안 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고 8개월을 병마에 신음하다가 1835년 세상을 떠났다. 또 그의 셋째 아우인 이성삼(요한) 역시 그 해 3월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반년이 채 못 돼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이들의 행적 중에 일부는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 내려와 후손들에게 박해를 뚫고 믿음을 지킨 용맹한 신앙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1801년 순교한 이경도와 이 루갈다의 막내동생인 이경언(바오로)도 책과 상본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수없는 배교의 유혹과 매질 속에서 순교하고 만다.

믿음의 자유를 얻은 후 광주 교구는 순교의 현장인 이곳에 본당을 설립키로 결정하고 1950년경 당시 옥 터였던 곳에 대지를 마련하고 곡성 성당을 세운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