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신학생
  • 전기수(全基洙) 그레고리오 신학생


전기수 신학생은 나주군 나주면 보산리 125번지에서 1922년 12월 29일 출생하였다. 서울 가톨릭 대학에 진학하여 1950년 5월 28일 시종직 4품을 받고 수학을 하던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나자 신학교는 휴교하고 신학생을 귀가 조치 시켰다. 전기수 신학생과 고광규 신학생은 1950년 9월 25일 전주에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공산군에게 학살당했는데 (김창문·정재선, 『한국 가톨릭 어제와 오늘』, 317-318쪽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함께 전주까지 같이 피난 왔던 동창생 김정용 신부의 증언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50년사』, 135쪽.) 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세 사람이 전주에 도착한 것은 9월 20일 경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곧 나의 매형 주선으로 전주 전동 골방에 피신처를 정했습니다. 나는 전주에 도착하여 5일째인 9월 25일 바로 다음날은(26일) 추석명절이요, 우리 79위 복자의 축일이므로 이날을 좀 더 뜻있게 지내보려는 심정에서 혼자 피신처를 나왔습니다. 나는 추석 준비를 해보겠다고 나왔으나 어수선한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으며, 주위 사람들도 만류하여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10시경 끔찍하고 무서운 소식이 나의 처소에 날아 왔습니다. 두 동료가 모두 체포되어 예수 병원자리 소위 정치보위부에 압송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제관 주방 담당 아가씨에게 들은 그들의 체포 경위를 말하겠습니다.

9월 25일 오후 전기수 신학생은 서울에서 20여일이나 많은 신세를 지고 왔던 ‘만념상회’의 송경섭(루가)씨 댁 소식을 그 댁의 처제되는 성심여중에 근무하는 최 수녀님(대구교구 소속인 최봉도 신부의 고모)께 전하고자 피신처를 나와 최 수녀의 은신처로 찾아가던 중 그만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온갖 신문과 고문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고 베드로도 체포를 당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 두 신학생 보다 앞서 체포되어 이들과 함께 감방생활을 하였던 강 수녀(살트르 성 바오로 회 수녀로 당시 전동본당에서 활동)는 당시 이들의 수감 모습과 거동을 나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받자 전기수 신학생은 열심히 식전 축문을 외우고 성호를 그으며 이 음식을 먹고 순교할 각오를 하자고 신덕(信德)에 불타는 열변으로 고요히 말하고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했습니다.’

27일 오후 5시경, 전주 형무소의 문이 개방되고 공산군이 도주한다는 희소식이 전해지고, 28일 유엔군의 진주를 환영한다고 전주 시내가 야단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나에게 가장 급한 문제가 두 동료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형무소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두 신학생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을 찾아 헤매다 희망을 걸고 예수병원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이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온 산을 다 찾아본 결과 산언덕 방공호 속에 학살된 시체가 무수히 많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시체들을 헤쳐 보았더니 참혹하게도 줄줄이 묶은 시체 중 맨 첫 번째에 전기수 그리고 두 번째에 고광규 두 신학생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시체가 부패했어도 고광규 신학생은 곧 알아볼 수 있었으나 전기수 신학생은 알아볼 수 없었는데, 내가 전해준 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의 시체는 부패하였으나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가 상한 것으로 보아 타살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 두 신학생은 부주교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주례로 연미사를 봉헌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뒤를 따르는 애도와 눈물 속에 치명자 이 누갈다의 무덤 아래 고이 안장했습니다.』


1950년 9월 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의 굴에서 28세의 나이로 순교한 전기수 신학생은 전주 성직자 묘 아래 1차로 모셔졌다가, 현재는 담양 성직자 묘지에 안장 (천주교광주대교구평신도사도직협의회, 『만번을 죽어도 하느님을 믿겠습니다.』(광주: 아름다운 세상, 2006. 1. 31), 214쪽.) 되었다.


  • 고광규(高光圭) 베드로 신학생

 

고광규 신학생은 1925년 7월10일 목포시 양동 12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가톨릭 대학에 진학하여 삭발례 품을 받고 신학생으로 수학을 하던 중 한국 전쟁의 발발로 전주로 피난하였다가 1950년 9월 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은 위의 전기수 신학생의 내용과 같다. 1950년 9월 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의 굴에서 2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전주 성직자 묘 아래 1차로 안장되었다가 목포 연산동을 거쳐 현재는 담양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